이야기를 낳는 이야기 _ Orhan Pamuk {내 이름은 빨강 My Name Is Red} by yiaong

몇 년 만에 다시 읽게 된 소설. 중세 이슬람 세계에서 한 세밀화가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겹겹이 겹쳐지는 이야기들이 다채롭다.원근법과 사실적인 재현으로 대표되는 서양의 미술 양식이 이슬람 세계에 들어오는 과정에서의 문화 충격과 예술적 고뇌도 흥미롭다. 그러고보니, 소설 전반부는 (원근법 없이) 이야기들이 평면적으로 배치되어 있고 후반부로 갈수록 (원근법적으로) 입체감을 띠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이렇게 나무, 금화, 개, 말 등등의 사물들이 각자의 입을 통해 자기 이야기를 하는 구조가 나는 참으로 재미있다. 누구나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얽혀드는 관계들. 이 소설의 팜므 파탈, 세큐레의 능청스러운 거짓말도 읽는 이들로 하여금 씩 웃게 만들지 않는가?

시시한 소리이기는 한데, 이 소설을 다시 읽으면서 나는 요즘 시대의 컴퓨터 프로그래머들과 그 시대의 세밀화가들을 견주어 생각해보게 됐다. 일면 비슷해보인다. 물론, (뻥이겠지만) 쌀알에 그림을 그려넣었다는 화가들에는 미치지 못할 수 있겠지만, 하루 종일 모니터 속의 암호문 비슷한 것들을 들여다보면서 요리조리 조물딱거리는 것이나, 남들 보기에는 별 차이 없는 미세한 부분에 매달려서 낑낑대는 모습 같은 것은 상당히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세밀화가들이 장님이 되지 않기 위해서 새벽녘에 높은 곳에 올라 먼 지평선을 바라보며 눈을 쉬었다는 얘기를 들으니, 컴퓨터만 바라보고 사는 요즘 사람들도 그렇게 한번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고.

나아가, 이 이야기 자체를 요즘으로 끌고와서 패러디해보면 재밌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C++이 좋으냐 Java가 좋으냐라든지, 아이폰이냐 안드로이드폰이냐라든지, 아니면 코딩을 할 때 tab이 네 칸이어야 하느냐 아니면 두 칸이어야 하느냐라든지, 주석은 달아야 하는지 안 달아야 하는지 등등, 프로그래머들끼리 박터지게 논쟁할 이야기거리는 얼마든지 있지 않나. 그 와중에 자기 실력이 최고라고 자부하는 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경쟁과 질투, 그리고 그들 중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개발 패러다임이 도래함으로써 밀려드는 충격의 파도, 전설적인 고수들의 코딩 컨벤션을 중시하는 이들과 '이단적인' 문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스크립트 언어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갈등…. 이야, 정말 재미있을 것 같은데!


내 이름은 빨강 1 - 10점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민음사


내 이름은 빨강 2 - 10점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민음사



예전에 읽고 썼던 글은 이것.
- 사라져가는 예술에 대한 매혹적인 세밀화 _ Orhan Pamuk {내 이름은 빨강 Benim Adım Kırmız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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