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내 삶 자체가 부조리 _ George Orwell {위건 부두로 가는 길 The Road to Wigan Pier} by yiaong

광산에서 석탄을 캐는 육체 노동자들의 삶을, 그리고 이른바 진보적인 사회주의자들 - 말하자면 '입 진보' 혹은 '살롱 좌파' - 을 예리한 눈으로 바라보고 기록한 책이다. 쉽게 읽고 허투루 넘겨버리면 안 될 책이다. 특히나 현실의 부조리에 대해 울분을 품고, '더 나은 세상'이 오기를 바라며 목소리 높이는 이들일수록 더욱 더.

나의 요 근래의 고민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 많아서, 책에서 밑줄 친 부분들을 (오래간만에) 옮겨보았더니 분량이 많다. 곱씹어 생각할 내용들이다. 말하자면 나의 고민은, 내 몸이 살아가는 방식과 내가 생각하고 지향하는 방향이 사실은 모순된다는 것에서 비롯한다. 즉, 내가 욕하고 있는 사회 체제 혹은 시스템 위에서, 나도 사실은 운 좋게 얻어걸려서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다는 심증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당위의 차원에서 '마땅히 이래야 해!' 라고 주장하는 내용이, 실상은 내가 발 딛고 서있는 기반을 무너뜨리는 - 밥줄을 끊는 - 것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예를 들자면 (틀린 생각일 수도 있다만), 미국인들의 소비 패턴을 모두가 따라 하면 지구가 일곱 개라도 모자랄 것이라는 말을 하면서 미국식 생활 방식을 버려야 한다는 지극히 건전한 주장을 하는 좋은 사람들이 있다. 나도 적극 공감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현재의 지구적인 자본주의 시스템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바로 미국의 (과)소비라는 이야기도 들린다. 즉, 미국인들이 건전한 소비생활을 하는 순간 우리는 배고파서 손가락을 빨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이지. 최소한 현재의 시스템에서는. 그러니, 내가 (상상 이상으로) 불편해지고 가난해질 것을 감수하지 않고, 어떤 좋은 주장을 하는 것은 무지한 일이거나 공허한 것일 수 있다는 게 나를 고민스럽게 만든다. 섣불리 '정의'를 외치기 어렵게 되는 것이다.

아, 그런데 여기에 더해서 판단을 더 어렵게 만드는 요인도 있는데, 좌파든 우파든 자기의 철학과 가치관에 충실한 사람들끼리 논쟁을 벌이고 경쟁을 하면 좋은데, 이쪽에든 저쪽에든 사사로운 탐욕과 부정부패가 끼어드는 통에 제대로 판단을 못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런 탐욕과 부패도, 늘 있을 수밖에 없는 상수항으로 놓고 생각을 해야 하나?

어쨌거나, 생각하고 말하는 것과 살아가는 것의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사는 게 어렵다는 것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약간이나마.


아마 대다수 사람들은 그런 곳 얘기를 안 듣는 게 좋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세계는 지상에 있는 우리의 세계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나머지 반쪽이다. 아마도 우리가 하는 모든 것, 말하자면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부터 대서양을 건너는 것까지, 빵을 굽는 것부터 소설을 쓰는 것까지, 모든 게 직간접적으로 석탄을 쓰는 것과 상관이 있다. 평화를 위한 모든 수단에 석탄이 필요하며, 전쟁이 터지면 석탄은 더욱 필요해진다. 혁명기에도 광부는 계속 일하러 가야 한다. 아니면 혁명이 중단될 수밖에 없다. 혁명도 반동도 석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상에 어떤 일이 벌어지건, 석탄을 파고 퍼담는 작업은 쉬지 않고 계속되어야 한다. (…) 히틀러가 거위걸음으로 행진하기 위해, 교황이 볼셰비키 사상을 지탄하기 위해, 로즈 경기장에 크리켓 관중이 몰리기 위해, 동성애자 시인들이 서로의 등을 긁어주기 위해, 석탄은 언제든지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p.47)

(…) 젊을 때 땅속에서 허리에 마구 같은 띠를 차고 두 다리를 사슬로 이은 채, 팔다리로 기고 광차를 끌며 일하던 할머니들이 아직도 더러 살아 있다. 그들은 임신한 상태로도 그런 일을 하곤 했다. 나는 심지어 지금도 만일 임신한 여자들이 땅속을 기어다니지 않으면 석탄을 얻을 수 없다고 한다면, 우리가 석탄 없이 살기보다는 그들에게 그런 일을 시키리라 생각한다. 어떤 육체노동이든 다 그렇다. 그것 덕분에 살면서도 우리는 그것의 존재를 망각한다. (p.49)


우리는 영국에서 수백만 명이 (또 전쟁이 터지지 않는 한) 이승에서는 절대로 번듯한 일자리를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게 낫다.
(…) 실업과 그 영향에 대해 알아보려면 산업 지대에 가봐야 한다. (…) 시골에 가면 (…) 도시처럼 한 블록 전체가 실업수당으로 살아가는 광경을 아예 볼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금 우리 문명에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아무도 일자리가 없으며, 일자리 구하기가 비행기를 소유하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축구 도박에서 50파운드를 따는 것보다 '더' 어려운 거리에서 살아봐야만 한다. (p.114)


어떤 면에서 그는 분명히 옳았다. 인간이란 무엇보다 음식을 채워넣어야 하는 가죽 부대이며, 그에 비해 나머지 기능은 신성한 것에 가깝지만 급한 순서로 볼 때 언제나 그 다음이다. 사람이 죽어 땅에 묻히면 그의 모든 말과 행동은 잊히지만, 그가 먹은 음식은 후손의 튼튼하거나 약한 뼈로 엄연히 살아남는다. 나는 먹을거리의 변화가 왕조나 종교의 변천보다 중요하다는 주장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한다. (p.123)


그런데 또 하나 그보다 더 심각한 어려움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서구 계급 차별 문제의 진짜 비밀과 맞닥뜨린다. 그것이 부르주아로 자란 유럽인은 자칭 공산주의자일지라도 몹시 애쓰지 않는 한 노동자를 동등한 사람으로 여길 수 없는 진짜 이유이기도 하다. 그것은 요즘에는 차마 발설하진 못하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꽤 자유롭게 쓰곤 하던 섬뜩한 말 한마디로 요약된다. "아랫것들은 냄새가 나"
그게 우리가 듣고 자란 말이다. "아랫것들은 냄새가 나."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넘을 수 없는 장벽과 마주친다. 어떤 호감도 혐오감도 '몸'으로 느끼는 것만큼 근본적일 수는 없다. 인종적 혐오, 종교적 적개심, 교육이나 기질이나 지성의 차이, 심지어 도덕률의 차이도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신체적인 반감은 극복 불능이다. 살인자나 남색자에겐 호감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입 냄새가 지독한 사람에겐 호감을 가질 수가 없다. 어떤 사람에게 아무리 호의를 품는다 해도, 아무리 그의 정신과 성품을 존경한다 해도, 입 냄새가 고약하면 그는 끔찍한 대상이 되며 당신은 마음속 깊이 그를 혐오하게 된다. (p.172)


그렇다면 반동이 아니라 '진보' 쪽인 중산층은 어떨까? (…)
이제는 선거에서 노동당에, 아니면 가능한 경우 공산당에 표를 던진다는 것 말고 그에게 무슨 변화가 가능할까? 그가 여전히 습관적으로 자기 계급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그와 뜻이 같을 노동 계급 사람보다는 그를 위험한 '과격분자'라 여기는 같은 계급 사람과 있는 게 훨씬 더 편하다. 음식, 와인, 의상, 독서, 그림, 음악, 발레에 대한 취향은 여전히 현저하게 부르주아적이다. 무엇보다 그는 반드시 같은 계급 사람과 결혼한다. (p.183)


나는 여전히 그들의 악센트에 반감을 느꼈고, 그들의 몸에 밴 거친 매너 때문에 몹시 화가 나곤 했다. 전쟁 직후인 당시는 영국의 노동 계급이 상당히 전투적인 자세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 전쟁 기간 내내, 그리고 전쟁 직후 한동안은 임금도 좋았고 일자리도 많았다. 그러다 다시 여건이 나빠지기 시작하자 노동 계급은 당연히 저항했던 것이다.
(…) 그들은 막연히 쟁취할 가치가 있는 유토피아를 기대했으며, 그에 앞서 'h' 발음을 하는 계급에 대해 공공연한 적개심을 보였다. (…) 돌이켜보건대 그 시절 나는 시간의 절반은 자본주의 체제를 비난하는 데 쓰고, 그 나머지는 버스 차장의 무례함에 분을 터뜨리느라 허비한 것 같다. (p.190)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영국인이 상대적으로 안락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인도인 500만 명이 기아선상에서 허덕여야만 한다. 그것은 참으로 못된 일이지만, 우리가 택시에 발을 들여놓거나 딸기 곁들인 크림 한 접시를 먹을 때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 대안은 제국을 뒤집어엎고 영국을 축소시켜, 우리 모두 아주 열심히 일해야 하고 청어와 감자를 주로 먹어야 하는 춥고 시시하고 작은 섬나라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느 좌파 사람도 원치 않는 바다. 그러면서 그는 제국주의에 대해서는 아무 도덕적 책임도 느낄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그는 제국의 단물은 다 빨아들일 태세이면서, 제국을 지키는 사람들을 조롱함으로써 자기 영혼을 구제한다. (p.215)


유감스럽게도 계급 차별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것만으로는 아무 진전도 있을 수 없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이 없어지기를 '바랄' 필요는 있되, 그만한 대가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그 바람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직시해야 할 사실은, 계급 차별을 철폐한다는 것은 자신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을 뜻한다는 점이다. 여기 중산층의 전형적인 일원인 내가 있다. 내가 계급 차별을 없애기 바란다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고 행하는 거의 모든 것은 계급 차별의 산물이다. (p.217)


그러나 파시즘의 근간이 되는 정서, 즉 사람들을 처음 파시즘 진영으로 끌어들이는 정서는 그리 한심한 게 아니다. (…) 전통과 질서에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파시즘을 일단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요령 없는 사회주의자들의 선전만 잔뜩 듣다 보면 파시즘을 유럽 문명의 장점을 지킬 마지막 방어선으로 보게 되기가 아주 쉽다. (…) 달리 말해 파시즘은 유럽 전통의 옹호자 시늉을 할 수 있었으며, 기독교 신앙과 애국주의와 군사적 가치에 호소할 수 있었던 것이다. (p.287)



위건 부두로 가는 길 - 10점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한겨레출판


덧글

  • 성호 2011/09/07 13:14 # 삭제

    마지막 말씀이 특히 공감이 가네요.
    저도 비겁하게도 여기서 더 이상의 노력은 못 할 것이라 선을 긋는 것 같습니다.
    어찌보면 적당하고 비겁한 협상이자 타협일 것 같습니다.
  • yiaong 2011/09/07 20:00 #

    나는 일단은...
    자기가 선 자리가 어디인지 우선 제대로 알고 나면, 뭔가 나름대로 유익한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다네.
  • battosia 2011/09/08 06:22 # 삭제

    오랜만에 묵직한 서평 감사합니다. 인간론에 관련된 글을 쓰고 있는데, 인간의 본질을 '모순'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Homo paradox?) 다른 어떤 동물도 인간 같이 모순을 만들지도, 모순을 몸에 새기지도, 모순을 사회를 이끌어가는 동력으로 삼지 않쟎아요?
  • yiaong 2011/09/08 19:15 #

    일리 있는 말씀이네요. 그러한 본질적 모순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서 좌파, 우파 뭐 그런 태도들이 나타나는 것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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