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는 누구의 것? _ Susanne Bier {인 어 베러 월드 Hævnen} by yiaong


내게 이 영화의 주인공은 크리스티안으로 보였다. 사건을 만들고, 그것을 키우고, 또 그것이 해결되는 한가운데에 그가 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도 영화가 진행되면서 변화 혹은 성숙하는 유일한 (것처럼 보이는) 인물이 크리스티안이기 때문이다. 어리지만 범상치 않은 눈빛을 가진 크리스티안은 나름대로 자기만의 '정의'를 이루고자 하는 인물이다. 어떤 잘못된 상황에 대해서 누군가는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때문에 그 누군가에 대해 분노를 느끼며, 그 사람은 책임을 져야 - 즉 처벌을 받아야 - 한다고 생각한다. 엄마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빠가 책임을 져야 하고, 짝이 된 친구 엘리아스와 자신을 괴롭힌 악동은 다시는 그런 짓을 못하게 혼내주어야 하며, 친구 아빠를 때린 무례한 남자에게는 어떻게든 본때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의도하지 않게 친구를 죽게 한 - 그런 줄 알았던 - 자기 자신도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영화는 여러 가지 다른 경우의 크고 작은 부당한 상황들을 보여준다. (상대적으로 사소한) 학교에서의 괴롭힘*)도 있고, 엘리아스의 아빠가 의료 봉사로 일하는 아프리카의 폭력배들은 (너무나 끔찍히도) 장난삼아 임산부들의 배를 가르는 범죄를 저지른다. 이러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공공의 질서는 지켜지지 않고 법은 그 효력이 미치지 못하는 각기 다른 상황들에서, 우리는 사적 복수에의 유혹에 이끌린다. 실제 그것을 실행할 '용기'가 있든 없든 간에.

아프리카 폭력배들의 에피소드에서는 그들이 너무나 쉽게 공분을 자아낼 만한 쓰레기같은 언행을 계속하기에 사적 복수에 대한 심리적 부담감이 덜하다. 오히려 쾌감을 주기도 한다. (어쩌면 그것이 나와는 상당히 거리가 먼 - 물리적으로, 상황적으로 - 일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에피소드, 놀이터에서 아이들끼리 놀다가 다툰 것을 두고 어처구니없게도 엘리아스의 아빠 안톤에게 손찌검을 한 남자의 에피소드는 좀 더 고민거리를 안겨준다. 아이들과 함께 다시 찾아갔을 때도 이어지는 당황스러운 부당한 폭력에 대해 안톤은 성숙한 대응 - "같이 때리면 결국 똑같은 사람이 되는 거야. 그 남자가 진 거야. 알겠니?" - 을 보여주지만, 크리스티안은 "그 남자는 자기가 졌다고 생각 안 할 걸요." 하고 말한다.

이 에피소드를 차분하게, 끝까지 따라가며 보여주는 게 이 영화가 보여주는 가장 큰 미덕이라고 느꼈다. 즉 많이 공감할 만하다는 것인데, 이는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겪게 되는 일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길거리에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는 눈꼽만큼도 없는,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무례한 년놈들을 우리는 너무나 자주 마주치지 않는가? 화가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르면서도 '상대할 가치가 없는 것들이야' 하면서 애써 분을 삭이지만, 그 년놈들은 또 아무렇지도 않게 똑같은 짓거리를 하면서 살 것이 분명하기에 화가 가라앉지 않는 경험을 너무나 자주 하게 되지 않는가.

사적 복수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크리스티안이 깨달았다는 것을 영화는 이야기하는데, 그 인물의 내면의 갈등 해소가 내게는 그다지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복수를 하다가 일이 잘못되어 (즉 돌발상황 등으로 계획이 차질을 빚어) 친구가 다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아서 복수는 답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됐다는 걸까? 아니면 엄마의 죽음이 아빠 때문이 아니란 걸 알았기 때문에 내면적인 분노가 사그라들었던 걸까? 잘 모르겠지만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다른 에피소드들에서도 여전히 문제는 잠복해있다. 학교의 악동은 또 다른 아이들을 괴롭힐지도 모르고, 아프리카의 폭력배들은 다른 우두머리와 함께 여전히 나쁜 짓을 계속할 것이다. 그리고 아들 주변의 아이들을 (조금만 문제가 있어 보여도) '사이코패스'로 몰아가는 엘리아스의 엄마도 사실은 좀 위험해보인다. 그리고, 함부로 손찌검 몇 번 했다가 자동차가 날아가버린 그 무례한 남자도 이제는 (영화 뒤에서) 또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다.

결국, (감독의 의도와는 별개로) 이 영화에 등장한 에피소드들은 모두 미해결 상태로 끝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나마 마음을 고쳐먹은 듯한 크리스티안의 태도도 썩 잘 이해가 가지는 않기 때문이다. '복수'가 필요한 여러 에피소드들을 (겸손하게) 보여주며 우리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이 영화는 주제에 대한 진지한 태도가 참 좋게 느껴지는데, 차라리 크리스티안의 에피소드도 어설픈 봉합보다는 더 명확하게 미해결 상태로 마무리하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흙먼지 속에서도 손을 흔들며 "How are you?" 를 외쳐대는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모습으로 영화를 마무리하는 감독은, 어쩌면 다음 세대를 살 아이들은 좀 더 나은 세상에서 살기를 바라는 소박한 희망을 갖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 이건 잘사는 나라든 못사는 나라든 어디에나 있는 듯. 도대체 애들을 어디서 키워야 하나? 근데 스웨덴이랑 덴마크랑 사이가 그렇게 사이가 안 좋은가?


+ 원제의 뜻이 뭘까 찾아보았더니, 아니나다를까 '복수'였다. (참고: http://translate.google.com/#da|en|Hævnen) 그리고 (영어 제목을 한글로 표기한) 한국어 제목(?)에서 'better'를 '베터'가 아닌 '베러'로 옮긴 점이 살짝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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