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호랑이 그리고 망망대해 _ Yann Martel {파이 이야기 Life of 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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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오래간만에 소설을 읽다. 그것도 말 그대로 한 번 잡으면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재미난 소설을.

태평양에서 배가 침몰했다. 열여섯살 소년과 함께 구명보트에 같이 올라탄 식구들은 얼룩말, 오랑우탄, 하이에나 그리고 호랑이 한 마리. 이제 어찌할 것인가?
수없이 많은 궁금증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물은 어떻게 구하고 뭘 먹으며 살아남지? 호랑이랑 작은 배 안에서 같이 사는 게 도대체 말이나 돼? 혹시 그 호랑이는 비정상적으로 평화로운 놈이었던 건 아냐? 비도 오고 폭풍우도 몰아칠 텐데 괜찮나? 다치거나 아프기라도 하면 어쩌나? ...

내가 이런 걸 궁금해할 것이라는 걸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작가는 (싱긋 웃으며)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대개 길지 않은 짧은 장들로 이루어진 구성은 마치 블로그의 포스트같은 느낌으로 한 장 한 장 장면을 그려준다. 짧은 글은 짧은 대로 간략한 스케치를 그리며 가볍게 건너 뛰는 느낌을 주고, 긴 글은 독자를 몰입시키며 충분히 감정을 음미할 수 있게 해준다. 부담스럽지 않게 이야기를 끌고 가는 솜씨가 무척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호기심만을 자극하는 모험 소설만은 아니고, 이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실존에 대한, 삶에 대한 성찰도 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사실 내게는 그런 건 나중 문제고, 책 읽는 내내 내 발 밑에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 알고 싶지도 않은 - 검은 물들이 출렁이고 있는 느낌이 들어서 오싹하면서도 즐거웠다.
(내가 말을 했던가? 난 수영을 할 줄 모르고, 결정적으로 그 '빠져드는' 느낌이 너무나 무섭다. 영화 {어비스 The Abyss}에서 에드 해리스가 언제 망가질 지 모르는 잠수복을 입은 채로 바닥 모를 캄캄한 심연으로 한없이 내려가는 장면이 나에겐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정말 무서워서.)

어쨌거나, 지루한 일상에 지친 모든 이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 지금 당장 태평양 한가운데로, 온통 물밖에 없고 하늘밖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당신을 이끌어줄 터이니.


파이 이야기 - 10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작가정신



ps. 아쉬운 마음에, 한 부분만 소개.

두 분이 원하는 게 뭔지 알아요. 놀라지 않을 이야기를 기대하겠죠. 이미 아는 바를 확인시켜줄 이야기를 말이에요. 더 높거나 더 멀리, 다르게 보이지 않는 그런 이야기. 당신들은 무덤덤한 이야기를 기다리는 거예요. 붙박이장 같은 이야기. 메마르고 부풀리지 않는 사실적인 이야기.
- p.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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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뎌내기 2005/02/21 12:20
그렇죠? 정말 대단한 소설이었어요.
요즘 다들 팩션, 팩션 하는데 글쎄요, 그런 소설들 읽다보면 좀 허탈해져요. 잘 다듬어진 상업적 글 같아서요.
그런데 파이 이야기는 정말 오래간만에 만난 진정한! 의미(제 기준에서)의 소설이어서 정말이지 너무 좋았지요. !^^!

yiaong 2005/02/21 12:56
아.. faction 이라는 말이 있나 보군요. 재밌는 말이네요.
이 책은 정말, 정말 그랬을 수 있을 것 같은 이야기로 사람을 쏙 빠지게 하더군요. 참 오래간만에 책 읽는 재미를 한껏 느꼈어요.

앗따 2005/02/26 02:07
이 책을 빌려봐야겠군.
난 'tuesdays with Morrie'를 읽고 있는데 책이 주는 힘이 참 대단하다는 걸 느껴. 내 영어 선생님 중에 70세가 훨씬 넘은 연로하신 분이 계시는데 너무 늙으셔서 발음을 알아들을 수가 없는거야. 그래서 대부분의 얘들이 이 늙은 선생이 싫다고 반을 옮겼지. 나 또한 옮기려고 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그럴 수 가 없더라구. 한 늙은이가 자신의 인생 마지막 길에서 그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을 아름답게 하고 있는데 인생도 모르는 젊은것들이 못하게 막는 것은 나쁜 짓 같더라구. (그 할아버지의 영어를 제대로 알아듣는 날, 난 누구보다 영어실력이 좋아지겠지?..--;)

yiaong 2005/02/26 11:44
우연의 일치인가?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번역한 사람이 이 책을 번역했어. 그리고 얼마 전에 쑥이한테 '모리..' 읽어보라고 추천해줬는데. :)

근데 나중엔 당신 입에서 느릿느릿 우물우물 할아버지 영어가 나오는 게 아닐까 몰라. ㅋㅋㅋ

by yiaong | 2005/02/20 03:03 | 책 libro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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