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하고 정리하라 _ 박원순 지승호 {희망을 심다} by yiaong


시민운동가 박원순을 지승호가 인터뷰했다. 재판정에서 직업이 뭐냐는 물음에 변호사라는 대답 대신 시민운동가라고 답했다고는 하지만, 단순히 시민운동가라고만 지칭하기에는 그가 해놓은 일들이 너무나 엄청나다. 전에는 잘 몰랐으나 이 책을 보고야 알겠다. 좋은 방향으로 사회를 바꾸어보겠다고 한 몸 던져 이렇게나 많은 일을 할 수가 있다니. 일전에 우리 교회에 오셔서 강연하실 때에는 그저 사람 좋아뵈는 활동가 쯤으로만 생각했더니만. 부끄러워진다.

인권변호사로서 정치적, 사회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맡아 변론하기도 하고, 참여연대를 세워 소액주주운동이나 국회의원 낙천낙선운동 등 사회적 비판, 감시활동을 펼쳐 기업들과 정치인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고, 아름다운가게를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쓰던 물건들을 버리지 않고 나누도록 하는 문화를 일으키고, 시민운동단체들이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아름다운재단을 통해 기부에 대한 인식 확산과 후원금 모금에 힘쓰고, 이제는 또 사회를 구체적으로 개선해나가기 위한 아이디어와 대안을 만들어내는 희망제작소를 이끌고 있는 사람. 이게 다 한 사람이 한 일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물론 그는 말하길, 실제 일은 간사나 활동가들이 다 했다고는 하지만.)

이분이 이런 일들을 해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가진 법률적 지식에 더해진 창조적 상상력이다. 가령 집시법의 세부 조항에 위반되지 않고 합법적으로 시위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1인 시위’라든지, 소량의 주식만을 갖고 있는 주주들의 목소리를 모아내어 해당 기업의 주주총회에서 기업이 정상적이고 윤리적으로 경영활동을 할 것을 요구하는 소액주주운동이라든지 하는 것은 법전 가운데에 잠자고 있던 조문들을 깨워서 (혹은 빈 틈을 노려서) 찾아낸 기발하면서도 효과적인 활동 방법인 것이다. 법이라는 것이 (지금의 이명박 정권에서처럼) 아무렇게나 공권력 마음대로 적용될 때에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피곤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공략하고 사용하느냐에 따라서는 효과적인 무기가 될 수 있는 부분도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던 이야기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이분에게서 좀 배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그건 무엇보다도 “모든 것을 기록하고 정리하라”는 이분의 당부였다. 참여연대에서 만들었던 현수막들도 버리지 않고 다 모아두면 그게 다 역사가 되고 자료가 된다는 이야기도 그렇고, 하버드 법대 도서관에 갔을 때 도서관을 통째로 복사하다시피 했다는 이야기는 일종의 감동을 주기도 한다. 처음에는 무료로 복사하게 해주다가 나중에는 너무하다 싶으니까 돈을 받자, 아예 개인 복사기를 하나 살까 생각까지 했었고, 또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다른 학생들이 학교에 못 오는 날이면 신나게 하루 종일 복사할 수 있어서 너무나 좋았다지 않는가! 그렇게 모아온 자료들이 훗날 참여연대 만들고,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만들어낼 때 다 밑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자기가 내용을 정리해서 책으로 내고 싶은 주제들이 너무나 많은데 일들 때문에 도저히 손을 못 대고 있어서 제발 유배 좀 보내달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울부짖는 박원순. 사실 이 부분에서는 나도 제멋대로 약간의 공감을 했는데, 나도 블로그에 뭔가 쓸 것들은 - 내용에 깊이는 없는 것들이기는 하지만 - 차고 넘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면, 이분은 시민사회운동의 최전선에서 매일매일 전투적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없는 반면, 나는 현재 백수로 지내고 있고 어디를 돌아다니는 것도 아닌데도 시간이 없다는(!!!) 차이가 있기는 하다. 써놓고 보니 참으로 불가사의한 노릇일세.

책 앞부분을 읽으면서는 좀 의아한 생각이 계속 들기도 했다. 사회를 바꾸려면, 무엇보다도 정치가 바뀌어야 하지 않는가. 물론 시민운동이 하나의 축으로 자리잡고 성장해야 하기는 하겠지만, 이 정도 역량을 가진 분이 그 바닥에서만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좀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쨌든 결국에는 정치를 통해, 정책으로 만들어져야만 뭐라도 개선되는 것이지 않느냐는 말이다. 정치가 정치꾼들의 놀음판이 되어서 인민대중과 동떨어진 딴 세상 얘기가 되고 있는 마당에서는 시민운동은 결정적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박원순씨에게 이제 그만 정치판에 뛰어드시라고 종용하는 것은 아니고, 남한의 정치 체제를 개선하려는 노력도 어떤 모습으로든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에 대한 나름대로의 대답도 책 뒷부분에 실려 있다. 이분은 한번에 중앙정치를 움직이려는 것보다는 지방자치, 지역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듯하고, 실제로 후배활동가들에게 지방선거에 나가라고 권유하기도 한다고 한다. 실생활에 직접 영향을 주는, 지역의 ‘조례’를 연구하기도 하고. 그리고 (책이 지금 옆에 없어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내 기억에) 박원순은 각자의 역할이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자기는 시민운동가로서 대안을 만들고 사람들을 움직여서 세상을 바꿔나가는 것이 행복하고 그것이 자기의 역할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어쩌면 정치적으로 뚜렷한 입장을 취해서 상대적으로 좁은 활동범위를 취하는 것보다는 울타리 없이 넓은 영역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때그때 필요한 일들을 해내는 지금과 같은 방식이 박원순에게 더 잘 맞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결론은 이거다. 이 책, 특히나 젊은 사람들에게 굉장한 도전이 될 만한 책이고, 배우고 깨달을 부분이 많다. 웬만하면 한번씩 읽어보도록 하자.


희망을 심다 - 10점
박원순 외 지음/알마



ps. 박원순은 변호사로 일하다가 영국, 미국으로 공부하러 갔을 때 보고 배운 것 - 그리고 복사해온 것 - 이 나중에 큰 자산이 되었다고 말한다. 유학가려고 했으나 떨어진 뒤끝에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입맛이 좀 씁쓸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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