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좀 그냥 내버려 둬 _ 고종석 {감염된 언어} by yiaong


말 또는 언어는 내가 평소에 관심갖고 있는 것 중 하나다. 그리고 아무래도 내가 쓰는 말인 한국어에 대해서는 조금 더 관심을 갖고 있다. 아, 뭐 그렇다고 내가 말을 잘 하거나 글을 잘 쓰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나 글을 ‘똑바로’ 써야 한다는 생각은 오래 전부터 하고 있다. 어릴 때 갖고 있던 모범생 기질이 (어울리지 않게도) 아직까지 남아있는 면도 좀 있는 것 같고, 우리말을 제대로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오덕, 이수열 같은 분들의 책 - 이오덕 {우리글 바로쓰기}, 이수열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말 바로 쓰기} - 을 읽은 영향도 있을 것이다.

그 책들은 대체로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단어들, 문장들이 얼마나 오염되어 있는 것인지를 밝히고, 우리말다운 표현으로 말과 글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책들이었다. 특히나 과도하게 쓰이고 있는 일본식 단어, 일본식 표현이 주로 지적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를테면 ‘~의’ 라든지 ‘~적’ 이라든지 또는 ‘그녀’ 라는 낱말 등등. 그 책들을 읽을 때 적극 공감하면서 무분별한 우리의(나의) 언어생활을 반성하고 한탄했었고, 가급적 올바른 말을 쓰도록 노력해야지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종석의 이 책은 그런 나의 뒤통수를 친다. 아주 세게.

그 다음 표적이 된 것은, 한국 한자음으로 읽기 때문에 한눈에 일본제 외래어인지를 알기는 어렵지만 일본어에서는 훈독을 하는 이른바 와고和語의 부류에 속하는 말들이었다. 예컨대 다치바立場에서 온 ‘입장’은 ‘처지’로 바꾸고, 데쓰즈키手續에서 온 ‘수속’은 ‘절차’로 바꾸자는 것이 순수주의자들의 주장이다. 언어민족주의자들이 이 싸움에서 거둔 승리는 보잘것없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입장’이 늘 ‘처지’로 대치될 수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같은 유형의 일본제 말들인 엽서(葉書: 히가키), 입구(入口: 이리구치), 출구(出口: 데구치), 할인(割引: 와리비키), 취소(取消: 도리케시), 조합(組合: 구미아이), 견습(見習: 미나라이) 같은 말들은 대치할 말도 마땅치 않다. (p89)
(...)
순수주의자들은 특히 중국제 한자어보다 일본제 한자어에 더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지만, 개항 이후 한국어에 편입된 무수한 ‘문명어’들은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 말들을 솎아낸다면 한국어는 정말 빈약하고 볼품없는 언어가 되고 말 것이다. (...) 게다가 한 언어 안에 외래 요소가 상당히 들어와 그 언어가 잡탕 언어가 되는 것은 별난 일도 무서운 일도 아니다. 그것은 한국어가 아스라한 옛날의 탄생 이래 끊임없이 겪어온 일이기도 하다. (p91, 92)
(...)
소통은 언어가 존재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이유다. 소통할 수 없을 때 언어는 쇠약해지고 끝내 사멸한다.
(...)
그들이(언어민족주의자들이) 외래어를 비판하는 것은 상상된 순수성에 대한 집착 때문일 것이다. (...) 그러나 순수한 한국어란 무엇일까? 언어민족주의자들이 상정하는 순수한 한국어 어휘는 한국어 사전에 오른 표제어 가운데 한자를 비롯한 외래 문자로 어원이 표기되지 않은 말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순수한 한국어 가운데도 깊이 살펴보면 그 어원이 중국어나 몽고어에서 온 것이 상당수 있다. (p98)
(...)
실상, 순수주의자들 가운데는 순수성에 대한 집착 때문에 소통의 가능성을 포기해버리는 경우도 있다. 한국어사전의 한 구석에 박혀있을 뿐 실생활에서는 오래 전에 죽어버린 말을 끄집어내 사용하는 경우 말이다. 이런 말들은 그 소통 효과에서 외국어나 다름없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그런 실천을 해야 하는가. (...) 더구나 이런 시도는 윤리적으로도 바탕이 튼튼하지 못하니, 자신의 우세한 지위를 이용해 자신과 극소수 동지들만이 아는 말을 사용하면서 내 말을 알아듣고 싶으면 이 말을 배워라 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언어민족주의자의 상당수는 민중주의의 제스처를 취하기도 하는데, 사실 언어에 관한 이들의 실천은 극단적으로 반민중적이다. 그들이 사전에서 찾아낸 순수한 한국어는 그 효과에서 그들의 책상 위에서 새로 만들어낸 말과 다름없다. 누가 그들에게 ‘개인 언어’를 사회에 강요할 권리를 주었는가? 그런 ‘개인 언어’가 이내 민중 언어로 통용될 수 있는 사회는 멋진, 무서운 신세계일 수밖에 없다. (p99, 100)

- [섞임과 스밈] 중에서


한국어의 순수성을 추구하는 행위는 실상은 존재하지 않는 어떤 상상 속의 것을 좇는 일이며, 그것은 다른 언어와 끊임없이 섞이고 변화하면서 발전하는 언어의 자연스러운 흐름조차도 막으려는 일이어서 바람직하지도 않을 뿐더러 가능하지도 않다는 말이다. 한 마디로, 섞이고 스미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니 언어에 대해서 제발 억지로 뭘 하려고 하지 말고 가만히 내버려두라는 것이 지은이의 주장이다. 심지어, 남북한의 언어가 서로 완전히 달라지더라도 상대방 언어를 배우면 되지 굳이 두 언어를 일치시키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고, 억지로 두 언어를 일치시키려고 하는 데 드는 비용과 부작용이 훨씬 더 클 것이라고까지 말한다(p37). 이 주장 또한 내가 이전에 갖고 있던 걱정을 단번에 깨뜨려주었다.

고종석의 이런 비판의 바탕에는 ‘언어에는 의사소통 기능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다’ 는 일반적인 (그리고 종종 과도하게 강조되는) 인식에 대한 비판이 먼저 깔려있음을 느낄 수 있다. 저 위에 인용한 부분 중에서도 “소통은 언어가 존재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이유” 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거니와,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 라고 하는 논쟁적인 글을 통해서도 그것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그 글 중간에 나오는 주석에 있는 내용을 먼저 정리해보자.

언어는 도구만은 아니지만, 그것이 다른 무엇에 앞서 도구인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
흔히 듣는 “한 언어가 담아온, 또는 그 언어로 표현된 문화와 세계관의 고유한 특질” 운운하는 언설이나, “우리는 우리의 모국어가 지령하는 대로 자연 세계를 분단한다”는 벤저민 리 워프의 단언은 그런(언어를 도구 이상으로 보는) 언어관의 표현이다. (...)
그런 주장들에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것들은 세계관의 언어 종속성을 정당화하기엔 너무 빈약한 것이 아닌가 싶다.
(...)
요컨대 근본적인 지각의 범주와 인식작용은 언어들의 표면구조와는 독립적인 보편성을 띠고 있고, 그 지각과 인식의 보편성을 반영하는 언어들도, 촘스키 이후의 언어학자들이 가정하듯, 심층구조에서는 서로 동일한 문법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렇다면 언어가 지닌 도구 이상의 몫이 언어의 본질적인 부분은 아닐 것이다. (p205)


자유주의자, 개인주의자로서 복거일을 자신의 스승으로 일컬으면서 시작하는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는 뜨거운 주제인 ‘영어공용어화 논쟁’ 을 다루고 있다. 책 전체의 삼 분의 일에 해당하는 백 여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는 이 글은 이 책의 백미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요약하기에는 너무 많은 얘기가 담겨 있다. --)

그래도 거칠게 결론만 요약하자면, 영어는 이미 국제어, 보편어로서 위상을 갖고 있고 앞으로도 오래도록 그 지위를 유지하면서 세계 대다수 사람들을 이중언어 사용자로 만들 것이므로,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배우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이미 사회적으로 그런 흐름 속에 있기도 하고. 이 말은 한국어는 이제 쓰지 말자거나 하는 말은 아니다. 민족어로서 한국어는 민족, 민족국가가 사라지지 않는 한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말한다. “중요한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을 차단하지 않는 것이다. 영어의 공용어화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적극적으로 영어공용어화를 추진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일이라면, 영어가 공용어로 되어가는 추세를 인위적으로 막는 것도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추세를 막기 위해 민족주의라는 벽돌로 담장을 두른다고 해서, 영어의 물결이 그 담장 바깥에 머물러 있어주지는 않을 것이다.”(p204)

한편, (꼭 영어의 이러한 장점 때문에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영어의 몇 가지 특성들을 언급한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알려진 언어 가운데 영어만큼 어휘가 풍부한 언어는 없는데, 그렇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영어가 기본적으로 외래어에 열려 있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p161)
(...)
프랑스어나 유럽의 고전어들(라틴어, 그리스어)에만이 아니라, 영어는 어떤 외래어에도 저항을 보인 일이 없었다. 영국이 영어의 중심이었을 때도 이미 영어 속에는 세계 구석구석이 원산지인 단어들이 들어 있었고, 20세기 들어 영어의 새로운 중심이 된 미국의 영어는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언어에서 많은 어휘를 차용했다. 그런 사정은 세계의 다른 곳에 뿌리를 내린 영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영어를 위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수많은 언어로부터 영어에 흡수된 풍부한 어휘는 영어에 미세한 결들을 만들어 이 언어의 세련화에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p162)
(...)
영어는 단지 외국어의 영향에만 둔감했던 것은 아니다. 영어는 그 자체의 ‘타락’에도 무심했다. 독일에서 창궐하던 ‘언어협회’들은 물론이고, 이탈리아의 아카데미아 델라 크루스카나 프랑스의 아카데미 프랑세즈에 해당하는 언어 보호 기관이 영국이나 미국에 없었다는 것은 영어 사용자들의 이런 열린 태도를 반영한다.
(...)
(영어의 타락에 분개했었던 영국의 작가인) 스위프트는 영어의 이런 ‘타락’을 상설적으로 교정하기 위해 아카데미의 창설을 제안했지만, 격렬한 논쟁 끝에 영국인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그 대신 그들은 사전을 편찬했다. (...)
이 사전들이 하는 일도 결국 아카데미가 하는 일처럼 언어의 규범을 세우는 일이지만, 아카데미(가 편찬한 사전)가 언어를 지도해 나간다면, (민간인이 편찬한) 사전은 언어를 따라간다는 근본적 차이가 있다. 말하자면 영국인들이나 미국인들은 자기들의 언어를 자유롭게 풀어놓았던 것인데, 그것은 자기들의 언어를 우상으로 섬겼던 한때의 독일인들의 태도와 크게 대비된다. (p164)

-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 중에서


영어공용어화라는 주제는 (일단 나부터도) 감정적인 반응이 먼저 나오기가 쉬운 문제이기 때문에 조심스럽긴 하지만, 잘 새겨서 들어보아야 할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수긍이 가는 대목들이 많다.

*

작년에 읽었던 {말들의 풍경}처럼, 이 책도 마치 보물창고를 만난 듯한 느낌을 내게 주었다. 아, 내가 이렇게 무식했구나. 일전에 ‘경세제민’이라는 말에 대한 얘기를 들으면서 얼핏 깨달았던 것이기도 했었지만, 유럽 문명을 직접 받아들이면서 그에 해당하는 언어를 만들어내야 했던 일본인들의 대단한 노력이라든지, 그들이 만든 한자어들이 대부분 한국어에 포함되고 또 중국어에까지 상당수가 유입되었다는 사실이라든지, 외래어를 한글로 어떻게 표기하는 게 좋은가 하는 것 등등을 비롯해 내가 관심이 있었으면서도 생각이 짧았거나 몰랐던 것들에 대해서 단 한 권의 책을 통해서 이렇게 많이 깨달음을 얻은 적이 또 있었나 싶다.

한편 고종석이라는 인물 자체를 드러내는 글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것도 흥미를 끌었다. 궁극적으로 한 개인일 뿐인 자유주의자, 반공주의자, 그리고 민족주의나 전체주의를 배격하고, 특정 종교나 이데올로기를 신뢰하지 않기에 삶을 허무한 것으로 여기고 자신과 타인을 혐오하며, 그럼으로써 한편으로는 한 번 지나고 나면 끝나버릴 이 삶에 더욱 집착한다고 고백하는 사람.

선생님으로 삼고 많이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감염된 언어 - 10점
고종석 지음/개마고원




The author, Jong-seok KO, is a famous columnist and a specialist in linguistics. On this book, of which title might be translated as "The Contaminated Language", he uncovers his insistences upon the policy and usage of Korean language in Korean society. Briefly, he insists that 'no policy is the best policy for a language'.

According to him, though some nationalists say that the 'pure' Korean language should be preserved by eliminating many contaminated elements such as the words and idioms originally from, for example, the Japanese language, it is impossible to remove all the foreign effects from a language. In addition to that, such an effort is useless and undesirable because the concept of the 'pure' language can exist only in one's imagination. There is no pure language in the world. The history of a language is a history of mixtures and interferences with other languages. Through those interactions, a language can evolve and become rich.

Then he shows an opinion on a hot issue of using English as another official language of South Korea. Through a very, very long article of over 100 pages, he introduces the stories of growth, change, and interactions of some dominant languages of the world. And he says that English is (and will remain long) as the most dominant language of the current world, thus more and more people in the world would become bilinguals. In this trend, it is better to follow the trend and to learn English early and it is unnatural to try to keep away that language from the Korean people. Even if the Korean people decide to accept English as their official language, the Korean language would not disappear unless the Korean race vanishes.
(It is very difficult to summarize his long, disputable article with just a few sentences.)

I feel the most important point of this book is that any extra effort to influence a language is undesirable and the main function of a language is the communication among people, above all other th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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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 2009/05/22 08:13 # 삭제

    소개 고마워요. 한국가면 읽어봐야 겠다. 마지막 말이 인상적이다 "궁극적으로 한 개인일 뿐인 ... 이 삶에 더욱 집착한다고 고백하는 사람" 그리고 책 표지의 빨간 글씨. 지훈씨~ 좋은 하루 시작하세요!!
  • yiaong 2009/05/22 08:38 #

    긴 내용 다 읽어주니 고마워요~ ^^
  • imc84 2009/05/23 00:04 #

    예전에 쓰신 글과 이번 글 다 잘 보았습니다. 간명한 서평이 인상적이군요. 저는 두 책 다 읽지 않았습니다만, 글쓰신 분과 아주 유사한 의식의 변화를 겪었습니다. 지금도 다소 보수적인 언어관을 포기하지는 않았지만요. 소개하신 책 네 권 전부 읽어보고싶네요. 안녕히..

    (영어로 쓰신 부분 첫단락 lagnuage 오타나셨네요...)
  • yiaong 2009/05/23 00:37 #

    사실 이오덕, 이수열 선생의 책들은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것을 가지고 읽었던 것 같아요. 각종 매체에서 우리말을 ‘잘못’ 쓰는 사례들을 일일이 열거하는 식으로 되어 있어서 읽다가 지치기 십상인 책들이었는데도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책들을 읽더라도) 진작 좀 여러 의견들을 들어보고 나서 읽을 걸 그랬다 싶네요. 그러면 덜 힘들었을 텐데..

    찾아주셔서 반갑고, 오타 지적도 감사합니다. :)
  • yiaong 2009/07/20 03:27 #

    [고종석] 거친 언어에 담긴 지독한 증오 (시사IN, 2009년 6월 22일)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684

    “한국어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국어순화론자들이 생각하듯, 외래어의 범람이 아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에 담긴 증오가 한국어에 상처를 낸다.”

    “한국 사회의 이른바 메이저 신문사라는 것은 정상적 의미의 언론이 아니라, 부자를 대표하는 정파의 선전국이다. 그들은 한 지면에서는 화합을 외치면서, 다른 지면에서는 증오의 언어를 뿌려댄다. 거대 보수 신문 셋의 발행부수 총합이 만일 600만 부라면, 그들은 매일 600만 번 증오의 언어를 퍼붓는 셈이다. 한국어가 거칠어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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