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숙한 완서씨 _ 박완서 소설집 {친절한 복희씨} by yiaong


소설이란 것을 많이 읽어본 편이 아닌 나로서는 책을 펴들기 전에 약간의 경계심이랄까 어색함이랄까 하는 것이 있었으나, 이 할머니의 편안하고 능수능란한 이야기 솜씨에 곧 푸근히 빠져들 수 있었다. 예상보다 짤막하고 경쾌한 문장들로 이루어진 무겁지 않은 문체 덕택에, 힘들이지 않고 술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어르신 앞에 앉아있는 느낌으로.

길이가 길지 않은 단편들의 모음집이어서 그런지 절정과 대단원 등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전통적인(교과서적인) 구조를 갖춘 이야기들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기는 했으나, 그와는 별개로 작가가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는 원숙하고도 곧잘 예리한 시선은 잘 드러나 있었다. 주제의식이 너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게 아닌가 싶은 작품도 더러 있긴 했으나 그리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고.

나이 많으신 작가의 소설들이기에 이 분이 사용하는 한국어는 어떤 모양일까, 좀더 살아있는 느낌의 생생한 우리말을 쓰시지 않을까 궁금한 마음도 꽤 있었는데, 평소에 접해보지 못했던, 의미는 잘 모르겠으나 느낌은 딱 오는 우리말 낱말들을 곧잘 쓰시는 것이 재미있었고, 반면에 '그녀'처럼 썩 우리말답지 못한 단어도 종종 등장하는 것에서는 약간의 서운함을 느끼기도 했다.

인상적이었던 것 한 구절은 「대범한 밥상」에 나오는 경실의 말.
"사람의 의지로 선택할 수 없이 돼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게 아닐까." (p219)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 보면 부도덕한 추문거리가 될 수 있는 것도, 당사자들의 상황에서는 (특히 큰 고통 속에 빠진 사람들의 상황에서라면) 그저 자연스럽게 일이 그렇게 풀려나간 결과일 수도 있다는 말. 넉넉히 나이든 작가의 원숙함이 느껴져서 참 좋았다. (글을 쓰다 보니 문득,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시아버지 유다Judah의 가계를 잇기 위해 꾀를 썼던 며느리 다말Tamar의 이야기도 떠오른다. 적절한 비교인지는 모르겠다만.)

나이 여하를 막론하고 많은 독자들이 박완서의 작품들을 읽는다는 것이 참 다행스럽다고 느껴진다. 나이드신 어른의 성숙한 지혜와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많은 사람들이 나누어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다행스럽다. 반면 (기우일지도 모르나) 약간 우려되는 것은, 이 분이 나이들어가면서 갖게 된 이런 원숙한 태도를, 그 나이도 되지 않은 사람들이 격에 맞지도 않게 겉으로만 따라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 분의 작품들 속 인물들은 위선과 허위의식, 이중성 등을 곧잘 드러내고 있고, 작가는 그 인물들과 세상살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도 비판의 칼날을 들이밀기보다는 넓게 그러모아 포용하는 듯한 느낌인데, 이런 이야기들을 읽는 이들 중에는 어쩌면 "그래, 세상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 하며 자기합리화 또는 자포자기의 태도를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

어쨌거나 박완서 님, 오래오래 건강하게 글 쓰셨으면 좋겠다. 우리 어머님께도 이 책 보여드리면 참 재밌게 읽으시겠다 싶다.


친절한 복희씨 - 8점
박완서 지음/문학과지성사



덧글

  • 예문당 2011/08/29 02:05 # 삭제

    글 엮고 갑니다. 반갑습니다. ^^
  • yiaong 2011/08/29 19:24 #

    예,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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