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한 이야기꾼과 제국의 역습 _ B.B. Scott {예수의 비유 새로 듣기 Re-Imagine the World} by yiaong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비유들을 되짚어보는 책. 비유란 무엇이며, 예수는 왜 비유로 이야기했을까, 그 이야기들은 무슨 의미를 담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결국 예수의 전략은 성공하였는가.

먼저 지은이는 글로 기록하지 않고 말로 이야기가 전해내려오던 시절의 분위기를 상기시킨다. 그 때의 이야기꾼들은 생각하는 방법이 달라서, 구체적으로 사유하고 기억할 만한 것들을 생각한다. 비유 속에서 생각하고 비유로 답한다. 그리고 우리는 비유를 통해 예수가 꿈꾸던 세상이 무엇이었는지를 들여다본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예수의 모습은 한마디로 불온한 이야기꾼이다. 사람들에게 익숙한 설정, 친숙한 소재를 끌고들어와 이야기하는가 싶다가도 그것을 확 뒤집어버린다. 정결하지 못한 것, 부패하는 것의 이미지로 인식되고 있던 누룩을 감히 하느님의 나라에 빗댄다. 예리고(여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 만난 유대인에게 생뚱맞게도 사마리아 사람이 나타나 도움을 준다. 이것들은 유대교 전통과 그 시절의 사회 분위기에서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다. 편안한 분위기로 재미있게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에게 갑자기 낯선 것을 들이대어 기대를 배반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재주를 가진, 다른 꿈을 꾸고 다른 북소리를 듣는 사람이었던 것.

하지만 예수의 칼날이 겨냥하고 있는 공고한 '실재세계'의 제국 - 이것의 반대 개념으로 예수는 '하느님의 제국' 을 반어적으로 내세웠다 - 은 그 칼날의 날카로움을 무디게 만들어 자기 체계 내에 끌어들이고 만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는 말을 그것이 나중에는 레바논의 장대한 백향목처럼 흥성하게 된다는 식으로 바꾸는 것처럼, 위험수위 넘나들던 예수의 발언들을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또 이전부터 전해내려오던 전통적인 관념들과 어울리는 모나지 않는 모양새로 바꿔버리고 마는 것이다. 제국의 안전에 위협이 되지 못하도록 말이다.

지은이가 마지막 장에서 정리하듯 이것은 결국 언어 대 언어의 싸움이었다. 예수는 자기가 꿈꾸는 세상을 그려내기 위해 낯선 어휘를 선택하여 언어를 선점하고, 익숙하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비유들로 그것을 전달하고자 하였으나 그것은 쉽지 않았다.
"그는 실패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의 구조는 비유들의 의미를 규정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짓밟고 또 고쳐 쓰기 시작했다." (p210)
하지만 지은이가 정말로 예수가 완전히 실패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예수가 품고 있던 불온한 꿈과 그 꿈을 품을 수밖에 없었던 조건들은 애석하게도 여전히 유효해보이고, 그 꿈을 자신의 것으로 삼을 사람들을 지금도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

본문에서는 중요한 비유들을 하나씩 비교적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는데, 하나하나 읽을 때마다 눈이 밝아지는 느낌이다. 한편으론 약간의 좌절감을 느끼게도 된다. 성서라는 텍스트 자체가 여러 전승과 그것들의 선택과 배제, 편집의 투쟁 결과물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나같은 일반 독자 혹은 평신도가 성서를 대할 때 기존의 전통적(제국적) 관념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눈으로 예수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일 거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건 뭐, 계속 의심하고 공부하는 수밖에는 없을 듯하다. 책을 읽고 나서도 모든 비유들이 명확하게 깨우쳐지지는 않기 때문이기도 한데, 약삭빠른 청지기의 비유는 여전히 어렵고 예수가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했는지 잘 모르겠다. '썩 본받을 만하지 않은 인물들의 행동들 가운데, 그 와중에서도 하느님의 뜻은 실현되었다' 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자칫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든 하느님은 일하시니까 괜찮아' 와 같은 태도로 비약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우려스럽다.

새롭게 듣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그리고 탕자들의 비유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숨을 고르고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는지 모른다. 체면과 격식과 경계를 무너뜨리는 손내밂, 받아들임.
그런 발칙한 꿈을 꾸었던 가난한 유대인 농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예수의 비유 새로 듣기
버나드 브랜든 스캇 지음, 김기석 옮김/한국기독교연구소


+ 관련 링크:
Re-Imagine the World: An Introduction to the Parables of Jesus - Amaz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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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딘가 닿겠지 : 바보야, 문제는 예수의 삶이야! _ 한완상 {예수 없는 예수 교회} 2009-05-29 00:11:38 #

    ... 서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을 다루는 관점도 계속 달라져왔다. 그리고 지은이가 영향을 받은 ‘예수 세미나’는 역사적 예수 연구 그룹들 중에서도 주류는 아니라고 알고 있다 (참조 - 익명의 덧글이지만 이쪽 분야 전문가의 견해이다). 그렇다면 그에 따른 새로운 해석을 소개할 때에도, 그것이 여러 해석의 가능성 중의 하나임을 좀더 분명히 밝 ... more

덧글

  • battosai 2007/06/17 05:00 # 삭제

    미국 성서학계의 가장 큰 위험성 중에 하나는 이분법적인 도식을 이용하여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만드려고 하는 (정치적) 의도에 있는것 같습니다. 예를 들자면 대부분의 예수 세미나 학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현실의 제국'을 대비시키고, 그 이후의 신학적/교리적/주석적 발전을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대한 제국의 역습으로 그리는 경향이 강한것 같습니다. 유럽 신학계에서는 때로는 미국 신학의 이러한 시도들을 '인식론적 폭력'이라고까지 부르더라구요.
  • yiaong 2007/06/17 09:34 #

    예수 세미나는 유럽 쪽 학자들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닌가보군요?

    그런데 그 정치적 의도는 무엇일까요? 자기들 나라(미국)의 제국적 속성을 반성하고 지양하려는 자성운동인가요?
    혹은 지리적으로 유럽 쪽에서 오랜 세월 발전해온 크리스트교 신학/교리를 '원래 예수의 말은 그게 아니었어' 하는 말로 부정하고, 뭔가 새로운 신학의 헤게모니 - 그런 게 있다면 - 를 쥐고 싶어하는 건가요?
  • battosai 2007/06/18 06:36 # 삭제

    예수 세미나는 미국 내에서도 소수의 학자들의 모임입니다. 미국 내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는 다양한 학풍 중에 가장 과격한 (?) 그러나 소수의 한 부류라고나 할까요.

    예수 세미나의 정치적 의도 내지는 숨겨진 이데올로기에 대한 분석 역시 많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일단 예수 세미나가 그리는 예수의 모습은 60-70년대 반전 세대들의 자화상이 21세기에 50-60대가 된 학자들을 통해 역사적 예수로 구현되었다고 할 수 있구요. 또한 예수 세미나의 대부분 멤버들이 백인 남성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사회정의 문제에 대해 상당히 부르조아적인 낭만화 현상이 강화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구요.

    역사적 예수 연구 역시 예수가 죽고 난 직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지금과 다른 역사학적 방법을 썼겠지만요). 재미있는 점은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관심은 언제나 부르조아 사회의 부흥과 늘 함께했다는 역사적 사실이죠. 그런 의미에서 20세기 후반-21세기 전반의 미국사회가 역사적 예수 운동의 메카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 yiaong 2007/06/18 11:26 #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연구 역사' 도 신경써야 할 부분인 것이로군요. 으아아아..
    그렇다면 이런 연구 결과들을 관심 갖고 소개하고 있는 우리나라 분들(!)에 대해서도 돌아봐야 할 테고요.
    그런 걸 읽는 사람들은 뭣 때문에 읽고 있는지도..

    정말 겹겹이 둘러싸인 매트릭스/양파껍질이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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