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_John Man {세상을 바꾼 문자, 알파벳 Alpha Beta: How 26 Letters Shaped the Western World} by yiaong


서울로 돌아온 후 교보문고에서 감격스러운 기분으로 이 책 저 책을 뒤적이고 다니다가 발견하고 냉큼 샀던 책. 영어에서 쓰이는 알파벳이 스페인어에서도 같이 쓰이고 있고, 반면에 발음은 다른 경우도 꽤 있다는 것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지던 차에, 영국의 역사가가 쓴 책인데도 한글에 대한 장(chapter)이 하나 따로 마련되어 있는 것도 눈길을 끌었다. 또 번역자(남경태)의 이름도 낯이 익고. 예전에 이 사람이 쓴 책을 나름대로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있거든.

주된 내용은 알파벳의 발명과 전래이다. 세상에 문명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 어떤 문자들이 선을 보였고, 어떻게 변형되거나 사라졌으며 또 어떤 필요에 의해 새로운 것들이 만들어지게 되었는지를 차분히 이야기한다.
다만 그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고고학, 서양 역사와 지리와 종교, 언어학 등에 대한 어느 정도의 기반 지식이 있다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은 나에게는 좀 지루한 감도 있었다.

어쨌거나 지금 너무나 익숙하게 쓰이고 있는 알파벳이라는 것이 하나의 '필요에 의한 발명품'이라는 것, 그것이 세월 속에서 여러 사회를 거치면서 정리되어 지금의 형태와 권위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은 얼마간 이해할 수 있었다.

한글의 창제 배경과 특징, 그 안에 담긴 철학적 의미 등을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한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한글 이야기가 나오기 직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정리돼 있다.

"알파벳의 의도는 서로 적대적인 두 힘을 화해시키는 데 있다. 한편에는 가급적 많은 기호로 가급적 언어를 정확하게 표현하려는 힘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기호의 수를 제한하여 누구나 쉽게 익히고 쓰고 읽을 수 있도록 하려는 힘이 있다. 이 두 힘의 화해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중략)
모호함과 과부하의 갈등에서 균형을 취하는 최선의 방법은 20~40개의 기호 체계를 사용하면서 기호와 발음의 불일치를 최대한 참아내는 것이다." (p.161~162)

그런 다음 지은이는 '어느 알파벳보다도 완벽으로 향하는 길에 오른 알파벳'으로서 한글을 소개하고 있다. 즉 적정 수의 기호만을 사용하면서도 해당 언어의 발음을 모호함 없이 잘 표현할 수 있는 좋은 모델로 인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보편적인 기준을 통해 봤을 때 한글이 갖는 우수성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은 또 하나의 소득.


세상을 바꾼 문자, 알파벳
존 맨 지음, 남경태 옮김/예지(Wisdom)


덧글

  • battosai 2006/10/16 12:31 # 삭제

    많은 사람들이 그런 면에서 한글이 가장 과학적인 글이라고 하는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는 뿌듯!! 그렇지만 두 가지 면을 동시에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첫째는 한글이라는 체계가 대부분의 다른 언어의 체계에 비해 상당히 늦게 - 1000년 이상이나 늦게- 발명되었다는 점 (그만큼 인간 의식의 복잡화가 진행된 이후에 만들어졌기에 인간 의식의 발달을 어느정도 반영하면서 만들어진 체계라는 점). 둘째는 한글의 과학성이 한국어 내지는 한국인의 언어 생활의 과학성과는 별개로 고려되어야 할 사항이라는 점. 한글 옹호론자들의 논지를 보면 이 두 가지를 잘 혼동하는것 같아요.
    그리고 하나를 더 붙이자면, 한글이 거의 모든 소리를 따라 기록할 수 있기 때문에 만만치 않은 부작용이 있다는 사실! 그건 한국인들이 거의 모든 외국어를 한국화된 발음으로 익힐 수 있다는 아주 치명적인 약점이 아닐까 싶네요.
  • yiaong 2006/10/16 12:53 #

    맞는 말씀이어요. 그런 면에서 이 책에서도 상당히 독특하고 흥미로운 사례로 소개하고 있는 듯해요. 문자 자체의 우수함과 동시에 세종의 정치적 결단을 높이 평가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겠고요.
    한글이라는 문자 언어와 한국어라는 음성 언어는 잘 구분해서 생각해야겠죠 정말. 우리가 훌륭한 문자를 사용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겠지만 그렇다고 말까지 훌륭하다고 섣불리 말할 수 없을 테니까요.

    근데 한글로 외국어 발음 표기하는 데에도 역시 한계가 많은 것 같아요. 대충 비슷하게는 되어도 절대 같지는 않은 게 많으니까.
  • 하하 2007/07/06 23:27 # 삭제

    ㅎㅎ한글로 영어단어 표현이 가능하고 또 우리끼리는 한글로된 영어를 읽어도 서로 소통이 가능하니...ㅎㅎㅎ 이게 좋은거겠죠? 나쁜걸지도...ㅎㅎ
  • yiaong 2007/07/07 02:55 #

    그런가요? 재미삼아 조금 해보는 건 몰라도 어렵지 않을까 싶은데요.
  • ngel 2013/11/23 07:47 # 삭제

    우리글에 대한 관련 지식이 짧아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처음의 한글(정음)은 지금의 한글 보다 더 다양한 음가의 기호들이 있었던 것이 당시의 주요 외국어인 중국어를 염두핸 둔 것이었을 것 같습니다.
    처음 한글(정음)의 경우, 우리말에는 잘 아쓰는 소리들이지만 중국어 갖고 있는 소리까지 포괄하여 표현할 수 있도록 만들었으나 지금의 한글은 현대 우리말에 최적화(?) 된 것이기에 세상이 좁아져 외국어를 접하고 사용할 기회와 이유가 많은 요즘에 한글로 완벽하게 다른 나라 말을 표현하는 것은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래도 기본적으로 소리의 정확한 표현을 목적으로 한 문자체계라서 상대적으로 더 원래의 소리에 가깝게 표현할 수 있고 사용하는 우리들도 그러한 배경속에서 언어를 구사하기에 비록 우리 글자에 없는 소리이자만 더 잘 인지하는 것 같습니다.
  • yiaong 2013/12/01 22:10 #

    말씀 감사합니다.
    저의 요즘 생각도, 한국어에 대해서든 한글에 대해서든 과도한 자부심은 갖지 않도록 주의하는 게 좋겠다, 입니다. 가령 제가 아는 어떤 분이 예전에 '옛한글까지 포함한다면 우리 한글로 모든 언어의 소리를 다 표기할 수 있다' 는 식으로 이야기했던 게 기억이 나는데요.
    그게 사실 우스운 주장인 것이 실제로 그렇게 사용하기도 어렵고 그럴 이유도 없기 때문이죠. 위 본문에 인용한 대로 모호함과 과부하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찾아야만 실제로 쓰일 만한 문자 체계가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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