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2월 07일
악마 같은 솜씨 _ Bernard-Henri Lévy {머리 속의 악마 Le diable en tête}
http://yiaong.egloos.com/1012504
대단한 이야기꾼을 만난 느낌이다. 이 소설을 지은 사람은 철학자, 작가, 영화감독, 저널리스트라는 타이틀을 달고 다닌다는 도대체 믿기지 않는 (게다가 잘 생긴) 남자이다. 주인공은 벵자멩이라는 이름의 프랑스 남자. 2차대전 중에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나치에 협력한 죄로 종전 후 사형을 당한다. 그 사실을 모르고 자란 매력적인 소년 벵자멩, 결국 아버지에 대한 모든 것을 알게 되고 그 이후 이 소년의 삶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간다.
벵자멩이라는 한 남자의 일대기를 지은이는 한 작가의 입을 통해, 그 작가가 수집한 여러 자료들을 통해 그려낸다. 태어날 무렵과 유년기는 어머니 마틸드의 일기를 통해, 청소년기는 아버지의 친구였고 후에 양아버지가 된 장 아저씨와 작가의 인터뷰 내용을 통해, 그리고 청년기는 벵자멩을 무척 사랑했던 아가씨 마리가 쌍둥이 동생에게 보냈던 편지의 내용을 통해서 드러난다. 그 이후의 격변기는 벵자멩의 변호사 알랭 파라디의 진술과 벵자멩 그 자신이 최후의 며칠 동안 남긴 글들을 통해 설명된다.
아, 그런데 이 글솜씨가 말이지,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빼어나다. 각 시기를 이렇게 다른 사람의, 다른 형식의 글로 구성한 까닭에, 과연 벵자멩이란 인물이 어떤 인물인가를 마치 퍼즐 조각 맞추듯 조금씩 추측해나가야 한다. 한번에 모든 게 다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당연히 각 사람이 벵자멩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 다르기 때문에,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기에게 유리한 관점으로, 자기를 변호하기 위한 관점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때로는 그 퍼즐 조각끼리 어긋나는 부분들도 있다. (구로자와 아키라의 {라쇼몽}이 언뜻 생각나기도 했다.) 그런 것들을 계속 수정해가며 - '어, 그런 게 아니었나보네?' - 이 주인공의 모습을 만들어가는 재미가 상당하다.
게다가 각각의 그 글들이 어찌나 재미있는지. 특히 마틸드의 일기와 마리의 편지는, 원래 일기와 편지라는 글의 성격상 일관된 흐름이 있지 않고 부분부분 파편화되고 이 빠진 그릇처럼 군데군데 빠진 구석이 있게 되는데, 그런 특성들을 절묘하게 이용하여 일정 정도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면서 속도 조절도 해 가며, 그 당시의 배경 묘사와 인물 묘사를 해내는 솜씨는 정말 뛰어났다. 실제로 한 젊은 엄마가 쓴 일기인 듯, 또는 실제로 사랑에 빠진 젊은 아가씨가 쓴 편지인 듯한 글솜씨는 말할 것도 없고.
그런 와중에 언뜻언뜻 드러나는 2차대전 말기의 분위기, 68혁명 시대의 분위기 등에 대한 묘사는, 비록 그것들에 대해서 자세 잡고 진지한 태도로 목에 힘주며 설명하는 건 아니지만 (물론 그래 봐야 재미 없을 테니), 지은이가 이미 갖고 있는 역사 인식 혹은 철학적 사유가 그 밑바탕에 깔려 있겠구나 하는 정도는 충분히 느낄 만한 것이었다. 그리고 여러 문학작품들에 대한 인용들도, 탄탄한 문화적 배경을 갖춘 사회에서 성장한 지은이가 자연스럽게 체득한 것들이란 느낌이 들어서 무척 부럽기도 했다. 일부러 유머를 넣은 부분도 있었는데, 지은이의 스승이었던 철학자 알튀세르를 묘사하는 부분이나, 나중에 벵자멩이 만나게 되는 이른바 신철학을 한다는 작가 - 지은이 자신을 가리키는 - 를 묘사하는 부분 등에서는 낄낄거리며 웃기도 했다. 그다지 새로워보이지도 않고 철학자인 것 같지도 않다나. 하하하.
주인공 벵자멩, 결국 이 사람은 자기 존재 자체가 배신당한 것 같은 죄의식을 평생 가슴 속에 품게 되고, 그로 인해 자신을 속죄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 극단적인 방향으로 치닫게 된다. 절대 순수한 마르크스주의, 극단적인 체제 전복 시도, 테러리즘. 두려움 가득한 표정으로 비누를 벅벅 문질러 손을 씻다가 상처를 내고 마는 {The Aviator 에이비에이터}의 주인공도 언뜻 떠오른다. 살아간다는 게 어쩔 수 없이 때를 묻히면서 가는 것임을, 내 안의 모순과 위선들도 어느 정도는 끌어안고 가야 하는 것임을 인정할 수 없었던, 자기자신을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불행한 한 인물의 이야기가 아닌가 싶었다. 아, 이 사람이 가진 성적 매력과 아름다움은 무척 부러운 것이기는 하지만. 근데 혹시 이 사람이 악에 가깝기 때문에 더 매혹적으로 보이는 것인가? 음, 그 주제는 일단 보류.
![]() | 머리 속의 악마 베르나르 앙리 레비 지음, 김병욱 옮김/프로메테우스 |
# by | 2005/12/07 01:38 | 책 libro | 트랙백 | 핑백(2)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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