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들 사이에서 길 찾기 _ 김욱동 {번역의 미로} by yiaong

번역에 있어서의 여러 가지 논쟁점들을 에세이 식으로 소개해주는 책이다. 외국어를 웬만큼 해독할 수만 있으면 번역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거라고 만만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게 절대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일깨워주기도 한다. 또 "외국어를 번역하려 하기에 앞서 모국어를 사용하는 훌륭한 비평가가 되어야 한다"(p.63, 존 드라이든)는 말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원천 언어와 목표 언어 사이에는 여러 층위의 차이점들이 존재한다. 단어 자체가 없을 수도 있고, 품사가 달라질 수도 있고, 문장 구성을 새로 해야 할 수도 있다. 이때, 어떤 식으로 단어와 문장을 재구성할지에 대해서 번역가는 수많은 선택지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한다. 완벽한 번역이라는 게 있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읽기에 어색하더라도 원천 언어에 가깝게 할 것이냐, 본래의 의미를 희생하더라도 목표 언어에 가깝게 할 것이냐도 대표적인 논란거리 중 하나이다.

간간이 소개되는 예시들이 재미있고 유용했는데, 그 내용들만 따로 정리해두어도 참 유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게 될른지 자신은 없다. 다시 보니 기억해두고 싶은 부분이 참 많은데, 눈에 띄는 몇 부분만 옮겨보면 이렇다.

(…) 더구나 시간을 나타내는 부사절 '~할 때'를 이끄는 접속사는(프랑스어 'Du temps que'나 영어 'when' 등) 인도유럽어 계통에 속한 서양어는 몰라도 한국어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다. 축역하여 '~할 때 ~했다'로 옮겨놓으면 마치 개화기에 서양 선교사가 양복을 입고 가마를 타고 설교하러 가는 것처럼 왠지 어색해 보인다. 번역가가 "내가 뤼브롱 산에서 양을 치고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라고 먼저 시간을 나타내는 부사절을 독립 문장으로 옮기고 난 뒤 두번째 문장에서 주절의 문장을 옮기는 방식을 택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만약 이 첫 문장을 원천 텍스트의 구문에 따라 "내가 뤼브롱 산에서 양을 치던 때, 나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목장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로 번역해놓으면 어딘지 외국 작품을 한국어로 번역해놓은 듯한 이국적인 느낌이 들 것이다. (p.226 - 자국화 번역의 예시, 알퐁스 도데의 [별] 번역)


(…) 한국어나 일본어 같은 교착어에 발달되어 있는 조사는 모국어에 웬만한 관심과 지식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 미묘한 뉘앙스를 깨달아 제대로 번역하기가 쉽지 않다. 가령 '-이/-가'와 '-은/-는'이 바로 그러하다. (…)
그런가 하면 '-에서'도 주격조사처럼 쓰이는 경우가 가끔 있다. 가령 집단이나 기관이 주어가 될 때는 '-에서'라는 주격조사를 사용해야 한다. "이 잡지는 어디서 나왔냐?"고 묻는 말에 "우리 출판사가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우리 출판사에서 만들었다"고 대답하는 것이 훨씬 더 한국어 어법에 맞다. 물론 "우리 출판사가……" 하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다른 출판사를 배제하는 의미가 좀 더 강하게 드러난다. (p.66)


번역가는 목표 언어에서 원천 언어의 낱말에 해당하는 어휘를 찾을 때 특히 연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연어를 얼마나 제대로 구사할 줄 아느냐에 따라 번역가의 능력을 판가름할 수 있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
영어도 마찬가지여서 "열띤 토론"을 흔히 "a heated discussion"이라고 한다. 'heated'와 의미가 같거나 비슷한 'inflamed'나 'fervent', 'fiery', 'hectic' 등의 형용사를 사용해도 괜찮을 것 같지만 명사 'discussion'은 그러한 형용사와는 낯을 가리며 짝이 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 영어 표현을 프랑스어로 번역할 때에는 "une violente discussion"으로 해야 하고, 이탈리아어로 번역할 때는 "una discussione accesa"로 해야 하며, 스페인어로 번역할 때는 "una discussión acalorada"로 하지 않으면 졸역이나 오역의 낙인이 찍히기 쉽다. 프랑스어에서는 '폭력적'이라는 의미가 강한 반면, 이탈리아어에서는 '불에 활활 탄다'는 의미가 더 강하고, 스페인어에서는 '흥분하다'라는 감정적인 의미가 강하다. (p.104)


(…) "agreeably disappointed in"이라는 구절은 우리말로 "~에 기분 좋게 실망했다"로 옮겨서는 그 뜻을 제대로 알 수 없을뿐더러 맛도 제대로 나지 않는다. 부사를 동사로 치환하여 "~이 기우에 그쳐서 기쁘다"로 옮겨야 좀 더 한국어답다. 원천 언어의 문법으로 보자면 부사 'agreeably'가 동사 'disappointed'를 꾸며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의미로 볼 때에는 행동의 결과로 번역하는 쪽이 좋다. (…)
이와 마찬가지로 "to my surprise"를 비롯하여 "to my astonishment", "to my disappointment", "to my dismay", "to my delight" 같은 영어의 독립부사구를 한국어로 옮길 때도 동사나 동사구로 옮기는 쪽이 훨씬 더 한국어답다. 이러한 부사구들은 '놀랍게도'나 '실망스럽게도' 또는 '기쁘게도'로 옮기는 것보다는 어떤 행동의 결과로 옮겨서 "~하여 놀랍다", "~하여 실망스럽다" 또는 "~하여 기쁘다"로 옮기는 쪽이 더 옳다.(p.272)



번역의 미로 - 8점
김욱동 지음/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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